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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랜드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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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과 위장 평화기 (1939년 9월~1940년 4월) ===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루이나]]는 영국·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에 따라 참전을 선언했으나, 이후 반년간 서부 전선에서 양측 육군이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만 거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상에서도 주력 함대 간의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훗날 '위장 평화기' 혹은 '가짜 전쟁'이라 불리게 되는 이 기간, 신문들은 "선전포고된 평화"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썼고, 루이나 국내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에 강화가 성립되리라는 낙관론까지 퍼져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미 조용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개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1939년 8월 말, 장갑함 2척과 보급함들을 미리 대서양의 대기 해역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개전 선언과 동시에 이들은 통상파괴 작전에 돌입했고, 남대서양과 인도양까지 넘나들며 수개월간 상선 10여 척을 격침했다. 격침 톤수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파장은 그 몇 배였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을 잡기 위해 연합군은 순양함과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수색 전대를 8개나 편성해 대양 전역에 뿌려야 했으니, 통상파괴전이 강요하는 비대칭적 소모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이 초기 습격전은 1939년 12월 남대서양에서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연합군 순양함 전대가 장갑함 1척을 포착해 손상을 입혔고, 중립국 항구로 피항한 이 배는 수리 기한을 넘기자 출항 직후 승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배를 폭파해 가라앉혔다. 함장은 며칠 뒤 "함과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자침 사건은 연합군 측에 개전 후 첫 승전보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동시에 독일 해군 수뇌부에게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단독 항행하는 습격함은 결국 수적 우세에 몰려 소모된다는 것, 따라서 다음 출격은 추격 함대를 정면에서 뿌리칠 수 있는 고속전함 전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이 이듬해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으로 이어진다. 한편 루이나 해군에게 위장 평화기는 뒤늦은 각성의 시간이었다. 개전 첫 달, 독립 항행하던 루이나 상선들이 잇따라 습격당하고 여객선 1척이 경고 없이 격침되어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지자, 여론은 해군의 무대책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의회 국정조사에서 해군이 상선 보호 전담 조직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해군 수뇌부 일부가 경질되었고, 그 공백을 타고 그동안 묵살되어 온 순양함 학파의 주장이 처음으로 정책 테이블에 올랐다. 1939년 말 승인된 호위함 긴급 건조 계획, 이른바 '방패 계획'은 기각되었던 란츠의 1937년 의견서를 사실상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조선소의 선대는 이미 주력함 건조와 상선 수주로 가득 차 있었고, 설계 간소화와 민간 조선소 동원에도 불구하고 첫 양산 호위함이 취역하기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해군은 임시방편으로 노후 구축함의 개조와 원양 어선·예인선의 징발로 구멍을 메웠으나, 이 급조 호위 전력의 실태는 "잠수함을 쫓기에는 느리고, 전함에게서 도망치기에는 더 느린 배들"이라는 당시 한 호위함장의 자조로 요약된다. 결국 위장 평화기의 루이나는 올바른 처방전을 손에 쥐고도 약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처지였다. 그 기다림의 끝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최악의 방향에서 왔다. 1940년 초부터 연합군 정보망에는 독일군의 스칸디나비아 방면 움직임을 시사하는 첩보가 누적되고 있었고, 2월에는 노르웨이 영해에서 독일 보급함이 연합군 구축함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져 양측의 긴장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루이나와 영국 수뇌부는 노르웨이 연안이 독일의 손에 들어갈 경우 북방 초계망 전체가 무력화된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하고 대응 상륙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결단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리고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이 먼저 움직였다. 반년의 위장 평화가 끝나고, 대서양-랜드해 전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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